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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의사에게도 ‘이타카’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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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수원시의사회 작성일26-09-04 10:15 조회1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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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오디세이’를 보며 나는 영웅의 모험보다 한 의사의 삶을 떠올렸다.


오디세우스는 전쟁을 끝낸 지략가였지만, 귀향길에는 자신이 내린 결정의 결과와 동료들의 죽음,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을 짊어져야 했다. 의사 역시 매일 불확실한 바다에 선다. 환자를 살리거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결단하지만, 최선의 선택이 언제나 최선의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수술실에서 의사는 때로 오디세우스처럼 신속히 항로를 바꿔야 한다. 계획한 수술이 예상대로 진행되지 않거나 출혈과 유착, 장기 손상의 가능성이 높아지면 더 큰 절개나 다른 방법을 선택해야 한다. 그 결정은 실패의 고백이 아니라 환자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전환이다.

그러나 환자에게 남은 흉터와 회복의 고통까지 의학적 판단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의사가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과 환자가 고통받았다는 사실은 동시에 참일 수 있기 때문이다.

오디세우스는 외눈박이 거인 폴리페모스를 속여 위기를 벗어나고도 자신의 이름을 외치는 오만 때문에 포세이돈의 분노를 산다. 의료에서도 위험한 순간은 큰 결정을 내릴 때만이 아니다. 수술이 잘 끝났다는 안도감, 풍부한 경험에서 오는 자신감, 익숙한 증상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순간이 새로운 위험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수천 번의 치료 경험도 다음 환자 한 사람의 결과를 보증하지 않는다. 그래서 의사는 성공보다 합병증을 더 오래 기억하고, 익숙함보다 경계심을 가까이해야 한다.

영화 속 오디세우스는 트로이 목마라는 천재적 계책으로 전쟁을 끝냈지만, 그 승리로 죽은 무고한 사람들의 원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호메로스의 원전보다 죄책감과 도덕적 책임을 강하게 부각한 현대적 해석이다.

의료인의 삶에도 비슷한 질문이 따라다닌다. 결과가 좋지 않았을 때 그것이 피할 수 없는 합병증이었는지, 더 일찍 알아차릴 수 있었는지, 설명은 충분했는지를 스스로 묻게 된다. 법적 책임과 별개로 의사의 마음에는 오래 남는 책임이 있다.

환자는 병원에 질병만 가지고 오지 않는다. 두려움과 가족에 대한 걱정, 무너진 일상, 의사에게 거는 기대를 함께 들고 온다. 수술 전 설명은 동의서에 서명을 받는 절차가 아니라 환자에게 닥칠 수 있는 바다의 날씨와 가능한 항로를 함께 살펴보는 과정이어야 한다. 환자가 위험을 이해하고 자신의 치료에 참여할 때 비로소 의사와 환자는 같은 배를 타게 된다.

위험한 상황에서 인간의 뇌는 코르티솔과 아드레날린을 분비해 즉각적인 대응을 준비한다. 반면 복잡한 결과를 예측하고 충동을 조절하려면 전전두엽의 숙고가 필요하다. 환자와 의료진 사이의 신뢰와 유대에는 옥시토신과 세로토닌을 포함한 사회적 결속 체계가 관여하지만, 신뢰를 호르몬 하나로 설명할 수는 없다. 신뢰는 정확한 설명과 일관된 태도, 약속을 지키는 행동이 반복될 때 형성된다. 의료 현장에서 가장 강력한 치료제 중 하나는 “무슨 일이 생겨도 이 의사는 나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다.

오디세우스가 수많은 유혹을 물리치고 돌아가려 했던 곳은 이타카였고, 그곳에는 페넬로페가 있었다. 페넬로페의 사랑은 맹목적인 기다림이 아니었다. 그녀는 두 사람만 아는 올리브나무 침상의 비밀을 물어 돌아온 남편이 진짜인지 확인했다. 사랑에도 확인이 필요하듯 의료의 신뢰에도 질문과 검증이 필요하다. 좋은 의사는 질문을 불신으로 여기지 않고 환자가 이해할 때까지 다시 설명한다.

30년 넘게 환자를 진료하면서 깨달은 것은 의술의 완성이 병을 고치는 기술에만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치료가 잘되었을 때 함께 기뻐하고,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생겼을 때 숨지 않으며, 환자의 원망과 아픔까지 들어주는 것이 의료인의 몫이다. 훌륭한 의사와 훌륭한 인간관계의 원칙은 다르지 않다. 상대를 존중하고, 불확실성을 솔직히 말하며, 잘못이 있다면 인정하고, 어려운 순간일수록 곁을 지키는 것이다.

오디세우스의 진정한 귀향은 이타카 땅을 밟는 순간이 아니라 자신이 남긴 상처와 책임을 마주할 때 완성된다. 의사에게도 이타카가 필요하다. 그것은 완벽한 성공의 장소가 아니라, 수많은 선택과 후회 속에서도 다시 환자 곁으로 돌아가는 마음이다. 의학은 인간의 몸을 치료하지만, 의료를 완성하는 것은 끝내 사람을 포기하지 않는 관계다.

이 글을 마치며, 지금까지 내 손을 거쳐 수술 받은 모든 환자가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이어가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아울러 기대와 다른 결과로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던 환자들에게도 온전한 회복과 평안이 찾아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들의 아픔과 기다림을 잊지 않는 것, 그것이 한 사람의 의사로서 내가 끝까지 감당해야 할 또 하나의 귀향일 것이다.

성영모 강남여성병원 원장



출처 : 중부일보 - 경기·인천의 든든한 친구(https://www.joongb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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